
STORY 1.
일렉시그니스의 공격부대, 메타포디움의 진영 안은 이른 아침부터 온몸으로 불만을 나타내는 부대원들로 인해 어수선했다.
북대륙 니켈윅토르의 남서쪽을 위치한 유서깊은 나라. 축복받은 지형적 요인으로 인해 캐드셔는 주변국에 비해서는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있었으나, 그럼에도 겨울이 되면 겹겹이 사람의 머리 위까지 쌓이는 눈은 결국 그들이 사는 곳이 북대륙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곤 했다. 특히 잦은 출전으로 진영에 돌아온 후에도 그동안 먼지로 눅눅해진 이불을 털어놓고 다시 방을 나서는 것이 일상이었던 일렉시그니스의 경우 이런 캐드셔의 날씨는 큰 골칫거리로 작용했다. 오늘도 결국 밤새 쏟아진 눈의 무게를 견디다 못한 메타포디움 숙소의 지붕이 굉음을 내며 꺾여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새로운 출전이 코앞이라는 변명으로 미루고 미루던 제설작업을 시작해야했던 부대원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부대원들 사이에서 부대장 테론 마이어는 몇 안되는 태연함으로 상황을 지켜보고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사령부의 회의로 인해 굉음으로 인해 날아갈 단잠조차 누리지못했거니와 어느정도의 직급을 가져 제설 작업까지 참여할 필요는 없던 그가 상황을 달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테론의 태도는 애초에 그의 관심거리가 그 밖에 있다는 것에 있었다. 새벽 중 갑작스럽게 결정된 카제르네에서의 임무. 회의의 막바지에 각 진영에 게시될 서류를 나눠주는 것으로 통보에 가깝게 내려온 임무는 지금껏 일렉시그니스가 해왔던 임무들과는 그 성격이 너무나도 달랐다.
곧 테론의 시선이 게시판에 붙은 종이로 향했다. 아마도 임무의 목적과 명단이 기재되어있을 추정되는 종이는 공간과 동떨어져 테론에게 이질적인 느낌을 선사하고있었다.
"왜 읽지도 못 하는 것을 들여다 보는지?"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어깨 너머로 옅은 핑크브라운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테론이 바라보고있던 종이를 떼어냈다. 테론과 같은 메타포디움의 수석군의관인 아그넬리 프리츠였다.
가벼워 보이는 흰 가운에 시선을 잡아 끄는 얼굴 위의 검은 베일. 그 안 쪽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표정을 알아낼 수 없으나 그마저도 늘상은 심중을 알 수 없는 웃음기가 배여있어 묘하게 심기를 비틀어놓는 남자였다. 테론의 미간이 묘하게 찌뿌려졌다.
"글자를 아예 못 읽는건 아냐. 속도가 느릴뿐이지."
"그걸 글자를 못 읽는다고 하는겁니다. 카제르네? 언제 붙여진거죠?"
종이에 적혀있는 도시 '카제르네 '의 군사권을 가지는 남작가 '클로드가 '의 새로운 가주로부터 요청이 들어왔다는 임무는 군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며 당분간 허술해질 방어선의 보강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흐음. 아그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카제르네라면 이미 한참도 전에 군사적 안정권에 들어간 도시일텐데 군을 개혁하겠다는건... 새로운 가주라는 사람과 군이 충돌한건가?"
"어차피 결정난 임무에 쓸데없는 추론은 그만둬."
점점 찌뿌려지는 테론의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종이의 모서리를 손톱 끝으로 더듬으며 웃던 프리츠가 말했다.
"이건 추론이 아니죠. 문제 처리할동안 뒷처리나 하고있어라 이거잖아요? 우리가 이런 잡일이나 처리할 군대는 아닐텐데."
"프리츠."
결국 경고하듯 아그넬리의 성을 부르는 테론의 목소리에 아그넬리의 어깨가 으쓱였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이번 임무가 꽤 만족스럽지만요. 요새 떠들썩하잖습니까. 희대의 연쇄살인마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부대장께선 신문을 못 읽으시던가."
곧 반달모양으로 휘어졌던 베일 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어느샌가 그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가 테론의 손에서 팔락이고있었다.
"할 말 없으면 가라. 사람 피곤하게 하지말고."
종이를 다시 게시판에 붙이는 테론에게서 숨김없이 드러나는 귀찮음에 아그넬리가 머쓱한 기색조차 띄우지 않고 여즉 웃음기가 도는 표정을 하고서는 빈 손을 내렸다.
"확실히... 입 잘못 놀리다 목이 날아갈수도 있으니."
"그보다는 손가락을 부러뜨리겠지. 다시는 글자 못 쓴다고 못 놀리게."
"맙소사, 그런 끔찍한."
소름끼친다는듯 제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던 아그넬리가 낮게 웃었다.
"아무튼 부대원들끼리 싸우는건 그만하지요. 가뜩이나 루께서 탐탁찮아한다는 메타포디움의 자제들인데."
그럼. 나중에 봅시다. 상쾌하게 고막을 울리는 아그넬리의 인사에 테론의 미간이 찌뿌려졌다. 난 너 보기 싫은데. 비게 된 손을 내린 채 말없이 애꿎은 종이의 명단을 노려보던 테론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또한 이번 임무가 여느 때와 달리 가벼움을 가지고있다는건 느끼고 있었다. 바이던인의 눈을 가진 캐드시안으로서 전장을 전전해온 30년. 본인은 살아남는 것에 목적이 있을뿐인 무의미한 싸움이었다지만 그는 다른 캐드시안들이 어떤 각오로 전장에 나서는지는 잘 알고있었다. 특히 눈이 휘날리던 그 날의… ...
짧게 과거를 헤매던 테론의 눈이 다시 앞을 향했다. 어쨌든간에 군인은 돈때문에 전장에 나설지라도 목숨만은 명예를 위해 사용해야하는 족속들이다. 이런 치정 싸움 수준의 임무를 맡는 것이 일렉시그니스의 명예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은 자신보다는 군단장이 더 잘 알텐데. 테론은 피곤한 표정으로 자신의 뒷목을 매만졌다.
"...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나."
멍하니 중얼거리던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임무는 임무다. 이미 위에서 결정난 사안으로 진을 뺄 필요는 없지않은가. 곧 테론 또한 소란스러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햇빛이 넓다란 창문을 넘어 벽면에 장식된 장식품들 위로 쏟아지고있었다. 러셀 그레이엄은 곧 멈추고있던 숨을 작게 들이마셨다. 붉은 카펫에 스며들었던 발자국 소리가 바닥을 때리곤 튕겨져나와 신발 밑창에 덕지덕지 달라붙고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러셀이 가문의 명으로 몸을 담고있던 군에서 나와 일렉시그니스의 부단장으로 재임(在任)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처음 이 곳에 들어선 날도 4년 전, 짧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동안 셀 수 없는 수를 들락였음에도 남자의 방은 늘 한결같은 묵중함으로 러셀을 맞이하곤했다. 더욱이 오늘같이 밑으로부터 번거로운 이야기가 들려오는 날에는. 러셀의 시선이 남자가 읽고있는 서류로 향했다.
"이미 얘기는 다 들었겠지."
침묵을 끝낸건 남자쪽이었다. 남자가 손에 들려있던 서류를 책상 위로 던졌다. 툭, 방 안을 울리는 피곤한 소리에 러셀이 괜스레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두께감 있는 종이뭉치 맨 위에는 새롭게 바뀐 클로드가의 문장이 검붉게 그 존재를 나타내고 있었다.
"오늘 전달받은 것을 말씀하시는거라면 간단하게는 확인했습니다. 썩 피곤하게 꼬였더군요."
카제르네의 군사권을 가지는 남작가, 클로드가의 가주가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것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다만 늘 도사리던 바이던의 위협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루테레샤의 경고에도 국경선에 세운 몇겹의 장벽안에 몬스터를 풀어놓은 클로드가. 그들과 힘을 합치고 싶어하는 귀족같은건 존재하지않았다. 오직 데페타로 야만인을 상대하고자했던 선대 가주의 만행에 모든 지원을 끊고 돌아선 캐드셔 왕정과, 나라가 자신을 버린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바이던에게 고통받던 시절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장벽 파괴를 반대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현 클로드 가주의 고통만이 있을 뿐. 쌓여가는 부채, 그리고 치열해지는 왕정과 백성간의 대립으로 클로드 가의 가주는 숨통이 조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일렉시그니스가 자신들이 카제르네에서 비밀리에 벌이고있는 실험을 알게 된 가주를 큰 장애물로 생각하지 않던 이유였다. 클로드가는 일렉시그니스를 적으로 돌릴 정도의 배짱을 가지고 있는 가주도, 그 가주를 대신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클로드가의 새로운 가주가 보낸 요청이 오기 전까진.
아무리 벼랑끝에 몰렸다 해도 그렇지 노블레스가 돈으로 노블레스의 명예를 얻어내고자 하는 평민에게 그대로 가문을 넘겨버릴거라곤. 나오는 한숨을 삼킨 러셀이 다시금 웃었다.
"역시 이 요청은 우리를 협박할 생각으로 보낸거겠죠?"
"쥐고 흔들만한 수준으로 보인거겠지. 우리도 클로드의 절박함을 과소평가한거고."
이제는 전가주일 뿐이지만. 남자의 덧붙임에 러셀이 짧게 신음을 냈다.
"이제 어떻게하실 생각입니까? 역시 조용히 없애..."
"어울려줘야겠지."
러셀이 놀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요청에 응하겠다는겁니까?"
"클로드가를 없애면 당분간 카제르네는 동결이야. 현재로서는 카제르네를 대체할 곳이 없어."
더욱이 인드라 의 상태가 불안정한 때에는. 남자가 손 끝으로 서류의 표면을 쓸었다.
"당장 새로운 피험체( 被驗體 )는 필요하고, 어차피 가주를 죽인다고 해도 뒤를 잇는 자가 우리 뜻대로 움직일거라고는 장담 못 해. 이렇게 된 이상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수 밖에."
대신, 다시는 헛된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쥐어버려야겠지. 파직. 작게 일어난 전기에 만들어진 불씨가 종이를 잠식해나가기시작했다. 곧 완전히 불이 붙은 서류를 창 밖으로 던진 남자가 러셀에게 말했다.
"클로드가 부탁한 기간 동안이라면 헛점을 만들어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일테니. 정 힘들면 그때 가서 없애도 그만이야."
러셀은 대답없이 남자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렇게 된 이상 일렉시그니스가 해야할 것은 자명했다.
"가서 모두에게 알리도록, 그레이엄."
곧 사내의 목소리는 방안을 선연하게 울렸다.
"우리는 클로드가로 간다."